
- 권민장 〈The Origin〉 연작, 영성과 물성이 봉합되는 자리
서구 추상은 오랫동안 물질과 정신을 떼어놓는 일에 몰두했다. 마크 로스코는 색면을 침묵의 숭고로 밀어 올리며 물질감을 지웠고, 피에르 술라주는 검은 마티에르의 '우트르누아(Outrenoir)'에서 빛을 표면의 반사로만 환원했다. 한쪽은 물질을 증발시켰고, 다른 한쪽은 물질만 남겼다. 권민장의 〈The Origin〉 연작은 이 오래된 갈림길 위에 다른 지점을 찍는다. 그의 사각 화면은 물질을 지우지도, 정신을 표면으로 끌어내리지도 않는다. 대신 둘이 한 점에서 만나도록 화면을 설계한다.
그는 한국 단색화의 수행적 반복을 물려받았다. 다만 단색화가 행위의 흔적을 비워내는 쪽으로 갔다면, 권민장은 그 흔적을 빛의 운동으로 채운다.
화면 앞에 서면 먼저 중심이 눈을 붙든다. 사각의 평면 한가운데에서 둥근 빛이 파동처럼 바깥으로 번지고, 그 정중앙에는 표면을 뚫고 솟은 뾰족한 꼭지점이 있다. 가까이 가면 화면은 평평하지 않다. 손끝으로 밀어 올린 물감이 두텁게 쌓여 능선을 이루고, 그 사이를 가느다란 선들이 파고든다. 빛은 그려진 것이 아니라 쌓이고 깎인 것이다. 주조색의 층이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빛난다.
- 사각과 원: 닫힌 것과 열린 것
사각형은 우리가 발을 딛고 선 현실의 대지다. 직선과 직각으로 닫힌 이 형태는 물리적 세계의 질서를 가리킨다. 그 안에서 파동 치는 원은 다른 차원을 연다. 경계가 없고, 중심으로 빨려 들거나 바깥으로 한없이 번질 수 있는 형태. 작가는 이 둘을 충돌시키지 않고 한 화면에서 견디게 한다. 닫힌 사각과 열린 원, 멈춘 것과 움직이는 것이 균형을 이룬다.
중심의 빛과 마주하는 순간 관람객은 잠시 자기 바깥의 소음에서 풀려난다. 타인의 시선과 빌려온 욕망을 내려놓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오래된 질문 앞에 선다. 이 멈춤은 정적인 것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이 말했듯 질량을 가진 것은 제 주위의 시공간을 휘게 한다. 화면 앞의 사람도 저마다 다른 삶의 무게를 지니고 있어, 같은 그림 앞에서 흐르는 시간의 밀도가 각자 다르다. 누군가는 오래 머물고 누군가는 빨리 지나친다. 그림은 그 차이를 허락한다.
- 지두점묘: 신체로 고정한 운동
권민장은 붓을 버렸다. 도구 대신 손끝으로 안료를 밀어 올린다. 그는 이 방식을 '지두점묘(指頭點描)'라 부른다. 손가락 끝의 맥박과 압력이 그대로 물감의 두께가 되고, 두께가 쌓이며 양(陽)의 면을 이룬다. 그런 뒤 직접 만든 날카로운 도구로 그 면을 파고들어 음(陰)의 선을 새긴다. 쌓고 깎는 일이 번갈아 이어진다. 음과 양이 한 표면에서 맞물린다.
이 반복은 기교의 과시가 아니라 수행에 가깝다. 중심의 꼭지점을 향해 빛의 결을 물결치듯 둥글게 엮어 나가는 동안 작가는 자기를 잊는 상태, 무아(無我)에 가까워진다고 말한다. 화면은 그 몰입의 시간이 굳은 자국이다. 신석기 빗살무늬토기에 새겨진 선들이 그러했듯, 문명 이전의 손이 우주의 질서를 몸으로 옮겨 적던 충동이 여기서 되풀이된다. 작가는 물질을 끝까지 쪼개 들어가면 고정된 알갱이가 아니라 진동하는 빛과 파동만 남는다고 믿는다. 그 보이지 않는 진동을, 그는 손끝의 자국으로 화면에 붙잡아 둔다.
- 게이트: 아래를 향하는 꼭지점
이 연작에서 가장 또렷한 선택은 중심의 꼭지점이 향하는 방향이다. 사각의 평면을 뚫고 솟은 이 정점은 위가 아니라 아래를 가리킨다. 작가는 분명히 말한다. 그림을 뒤집어 꼭지점이 하늘을 향하게 둘 수도 있었다고. 그러나 그는 이 점이 만유인력에 순응해 아래로, 자신이 딛고 선 땅으로 내려오도록 둔다.
방향의 선택은 곧 세계관의 선택이다. 꼭지점이 위를 향하면 그것은 초월로의 상승, 현실을 떠나는 동경이 된다. 아래를 향할 때 의미는 뒤집힌다. 위에서 내려오는 에너지가 깔때기를 지나듯 이 점을 통과해, 관람객이 지금 서 있는 바닥으로 쏟아진다. 이상은 멀리 떠 있지 않다. 발밑으로 모인다.
왜 아래인가. 작가에게 사람은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외부의 파도에 흔들리다가도 자신을 되찾고 원하는 현실을 세울 수 있는 자리는 허공이 아니라 지금 딛고 선 대지뿐이다. 꼭지점은 그 사실을 가리키는 나침반이다. 종착지는 하늘이 아니라 관람객의 발이다. 〈The Origin〉이 거는 제안은 그래서 간명하다. 떠나지 말고 내려와 뿌리내리라는 것.
권민장의 화면은 영성과 물성을 양자택일하지 않는다. 사각과 원, 양과 음, 쌓기와 깎기, 위와 아래를 한 점에 묶는다. 그 매듭이 화면 한가운데의 꼭지점이다. 그 앞에 선 사람은 멀리 솟구치는 대신 자기가 선 자리로 돌아온다. 빛은 위에서 비추는 것이 아니라, 발밑에서 다시 켜진다.
인간의 본질에 자리한 것은 결국 빛이라고 믿습니다. 건반을 누르듯, 손끝의 울림을 화폭 위에 하나씩 채워 나갑니다.
제가 그리려는 빛은 손에 잡히지 않는 형이상학적 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매일의 일상에서 마주하는 실재하는 빛, 그 성질을 빌려 옵니다. 그래야 누구든 편안하게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화면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모든 것을 품는 원형의 빛으로 모입니다. 원은 근원의 단순함을 보여 주는 동시에, 사방으로 끝없이 번질 수 있는 빛의 성질을 담습니다.
제 작업을 지탱하는 두 축은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과, 그 근원에 있는 빛에 대한 물음입니다. 어릴 적 빛과 색을 향한 호기심이 뇌리에 강하게 남아, 저는 빛의 근원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 길을 걷는 동안, 빛에 대한 고찰이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와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차가운 진공이 아니라, 맥박이 뛰는 현실을 사는 존재이니까요.
제 모든 화면의 한가운데에는 뾰족하게 솟은 하나의 꼭지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법이 만든 돌출이 아니라, 차가운 현실의 외면과 뜨거운 영성의 내면을 잇는 통로입니다. 현실 세계와 이상 세계는 결국 육체와 영혼이라는 층위로 바꿔 말할 수 있습니다. 내면과 외면, 육체와 영혼, 현실과 영성. 이 두 극단이 화폭 중앙의 꼭지점에서 봉합될 때, 사람은 그토록 찾던 삶의 이치에 닿고 실존의 공허를 채울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꼭지점을 거꾸로 세워, 저 높은 하늘을 향하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만유인력에 순응해 아래로, 제가 딛고 선 땅을 가리키도록 둡니다. 꼭지점이 향하는 종착지는 하늘이 아니라 지금 제가 서 있는 땅이고, 제 발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외부의 파도에 흔들리고 자신을 잃곤 합니다. 그러나 그 소음에서 벗어나 삶의 주권을 되찾고 원하는 현실을 세울 수 있는 자리는 허공이 아니라 이 단단한 땅 위입니다. 그래서 꼭지점은 제 나침반입니다.
저는 붓을 내려놓고 손끝에 물감을 묻혀 작업합니다. 손끝으로 두터운 결을 밀어 올려 양의 면을 쌓고, 직접 만든 날카로운 도구로 그 면을 파고들어 음의 선을 새깁니다. 쌓고 깎기를 거듭하는 동안 저는 설레고 두근거리고, 때로 눈물을 흘립니다. 중심을 향해 빛의 결을 엮어 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저를 잊습니다. 그 몰입의 시간이 그대로 화면 위에 굳습니다.
지나친 형이상학으로 기울어 허공에 뜬 신기루가 되지 않도록, 저는 현실을 사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늘 중심에 둡니다. 발을 딛고 선 땅과 유리되지 않은 자리에서, 실재하는 근원의 아름다움을 찾는 저의 여정은 손끝의 힘이 허락하는 한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